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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영상

211115:: 완다비전

 

 나에게 MCU 캐릭터 중에서 제일 안타까운 사람을 골라보라고하면 주저없이 완다를 선택할 것이다. 부모님 사망 후 의지하고 있던 오빠를 잃고, 그 다음으로 공감대를 쌓던 애인마저 잃었으니. 가족들은 타인에 의해 죽었다고 하지만 애인은 대의를 위해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했고, 그런 그를 적이 다시 살려 죽이는 꼴을 봐야했을 완다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감히 헤아릴수도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제작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또 어떤 시련이 완다에게 닥칠까싶어 가슴이 아팠다. 인피니티워에 놀랐다가 엔드게임에 분개한 사람인지라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제일 슬펐던 점은 일반인조차 히어로의 생사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상대와 싸우는 초인들인지라 그럴까. 이런 점을 염두했을 때 MCU의 히어로들은 화제성을 띄는 연예인과 사람의 생사를 책임지는 공무원의 속성을 둘 다 띄고 있는 것같다. 나는 일반인인지라 그들의 심정을 완전히 헤아릴수는 없다만 최근 금쪽상담소에서 최진실 씨의 아들 최환희 씨가 자신만 보면 모두 힘내라고 말한다며, 무슨 의미로 말하는 건지는 알지만 점점 그게 듣기 싫어진다고 말한 바 있고, 송선미 씨는 '남편의 부고를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그 사건을 어떻게 전달해야할지 모르겠다. 외국으로 가야하나 생각한 적도 있다'고 한 것을 보아 동료 혹은 가족의 죽음을 모두가 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겠구나 생각한 적 있다. 그 상황속에서 나라는 히어로들에게 경외와 두려움의 시선을 보내고 예측할 수 없는 그들의 힘을 휘두르려하며 일이 잘못돼 사상자가 나오면 지키지못한 그들의 탓이라고 말하기까지한다. 초인이지만 동시에 사람인 이들이 어떻게 그걸 버틸 수 있을까.

 

 완다는 그런 현실을 악몽으로 치부하고 싶었을테고, 결국엔 잘 해결되리라 믿고픈 마음을 시트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한 걸지도 모른다. 영원한 행복이자 웃음이 넘치는 그곳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생각없이 웃는 삶을 살고 싶었던 소망. 그런 마음을 먹을 때까지 완다가 어떤 감정을 곱씹었을지 생각하면 안타깝고 먹먹하다. 우연히 초능력을 얻어 대두되지 않은 최강자 중 하나의 자리를 얻었지만 완다는 그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었을 뿐인데. 하물며 애도란 결국 계속 사랑하는 것이라는 비전의 말을 가슴 속에 품고 다른 건 다 필요없으니 장례식만 치뤄달라, 그의 시신을 묻고 싶다는 완다 앞에 오체분시된 애인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세상이 완다에게 너무 잔인하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인생에는 다 규칙이 있잖니. 편해지자고 마음대로 나이를 먹을 순 없어. 죽음을 되돌릴 수도 없고. 아무리 슬퍼도 말이야. 알았지? 어떤 것들은 영원하단다."라고 본인 입으로 말하는 것을 보아 완다 본인도 이 일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을텐데도 더 이상 현실을 버틸 수 없어 도피를 강행하는 걸로 보여 가슴이 찡했다.

 

 그래서 완다가 자기 대신 악몽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외치고, 제가 가꾼 환상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비전과 이별을 맞이하는 모습이 얼마나 비참하면서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애도란 결국 사랑하는 것이라는 비전의 말처럼 이제는 제 옆에 없을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애인과 자식들을 계속해서 기리며 그들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겠지. 그게 완다가 터득한 가족은 영원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라는 점이 슬프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자 건강한 방법일 터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완다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에 MCU 세계관에서 히어로들의 복지를 좀 챙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스토리로 말이 길어졌는데 드라마의 연출도 꽤 좋았다. 특히 화면비로 시트콤의 연도가 다르다는 걸 알려주고, 자주 쓰이는 화면비와 교차하여 현실을 오가는 방식은 이 드라마의 아이덴티티로 남을법했다. 제인의 인턴에서 천체물리학 박사가 된 달시와 어머니 마리아 램보를 잃은 모니카를 보여주면서 블릿의 영향이 히어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크게 미쳤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좋았다. 특히 모니카 램보의 등장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연대와 공감으로 이어져 이별이 있으면 만남도 있다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깨우치게하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모니카 램보의 각성과 완다의 완전한 성장이 드라마로 이루어진 점, 그리고 악역인 애거사 하크니스가 차후에 나올 시리즈에도 등장할 것 같다는 점 때문에 '안그래도 볼 게 많은 세계관인데 이제는 드라마까지 챙겨봐야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꽤 많은 돈을 벌고 있는 작품이니 갑자기 디즈니가 부도나지 않는 한 세계관은 점점 더 확장될테고, 그럼 결국 내가 그것들을 전부 챙겨보던지 아니면 이 세계관에 흥미를 잃어 놓던지 둘 중 하나로 끝을 맺을 거란 걸 알고 있음에도 이런 부분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한편으로 끝나지만 드라마는 회차가 많기 때문에 그런 걸까. 회차가 많은 만큼 긴 감정선을 보여준다는 장점도 있지만 영화도 따라가기 벅찬 마당에 드라마까지 따라가야하다니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엔드게임 때 원년멤버인 나타샤를 그렇게 보낸 것에 욕이란 욕을 다 했으면서 디즈니 플러스가 나오자마자 런어웨이즈와 완다비전을 보고싶은 컨텐츠로 찍은 걸 보면 계속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세계관을 소비할 듯싶다…. 이제와서 놓아버리기엔 내가 사랑하는 히어로들이 너무 많다… 이건 뭐 개미지옥도 아니고.

 

 아무튼 참신한 연출과 함께 완다가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을 볼 수 있어 기뻤다. 한번쯤은 완다의 속내를 파헤치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이 드라마가 반가웠다. 이걸 봤으니 이대로 닥터 스트레인지 인 멀티버스 오브 매드니스도 보러가야겠구나 싶지만 덕분에 성장한 완다가 닥터 스트레인지를 만나 어떤 역경을 딛을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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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영상

211113:: 생쥐 구조대

 

 친구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함께 보게 된 영화. 나의 첫 디즈니 플러스 영화다. 생쥐들의 '국제 인명 구조 협회'에서 일하는 버나드와 헝가리 대표인 비앙카가 '악마의 골짜기'에 끌려가 보물찾기에 이용당하고 있던 페니의 구조 요청에 응답하여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로 1970년대에 제작됐다. 고전 영화라는 점 때문에 이미 감안은 하고 있었으나 역시나 그 시대상의 여성 혐오가 뚜렷하다. 꽤 젊고 아름다운 측에 속하는 비앙카가 '국제 인명 구조 협회'의 마돈나라는 점이나 여성은 이런 위험한 일을 감당해내지 못할 거라 말하는 생쥐들. 둘이 맡은 것이 잠복 임무임에도 향수를 뿌리고, 비행기는 꼭 연착된다는 불확실성을 믿으며 여러 짐들을 챙기느라 늦은 비앙카… 생쥐 구조대 소속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성은 꾸미느라 임무를 뒷전으로한다는 시선이 보여 웃음이 나왔다. 암컷이라는 이유만으로 임무를 혼자 맡지 못했음에 분개하지도 않고 마치 그 의견을 뒷받침하는 것마냥 위기에 빠진 비앙카를 백마탄 왕자님처럼 계속해서 구해주는 버나드는 덤. 그 시대만의 나이브함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그렇지만 고전 애니메이션 특유의 거친 붓터치가 느껴지는 배경이나 등장인물들이 행동할 때마다 그에 맞춰 바뀌는 음악(바짝 긴장한 채 살금살금 걸으면 느린 템포의 노래가 나오고 도망갈 때는 빠른 템포의 노래가 나온다), 2D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된 몸짓과 그들을 이루는 스케치 선들이 어릴적 봤던 디즈니 영화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개인적으로 디즈니의 3D 애니메이션보다는 2D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나의 감성을 자극했고, 뚜렷한 인과응보식의 결말 또한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괜시리 신선하게 다가왔다. 욕망에 가득 차 다이아몬드를 위해 어린애마저 이용하는 마담 메두사의 행보는 눈쌀이 찌푸려졌지만 어릴 때에는 무서워하기 바빴던 악역에게 이런 감상을 남길 정도로 몸과 마음이 성숙해졌구나 느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온 디즈니 악역들에게는 운전을 거칠게 해야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마담 메두사가 운전을 거칠게 할 때 101마리의 달마시안에 나오는 크루엘라가 생각나서 미소가 지어지더라.

 

 비교적 크기가 작은 생쥐들에게 맞춘 물건들 또한 영화에 재미를 더해줬다. 새가 비행기이자 기장으로 나왔던 점이나 안전 좌석이 통조림 모양인 점, 배는 나뭇잎 모양이고 그걸 이끄는 건 날개달린 곤충인 점 등. 주토피아 때도 생각했지만 인간이 아닌 주연들에게 맞춘 소품 아이디어는 아기자기함으로 귀여움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을 즐겁게 해준다. 

 

 장단점이 뚜렷한 영화였지만 악어에게도 지지않고 용감하게 맞섰던 페니가 결국에는 자기가 원하는 가족을 얻은 엔딩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페니가 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희망을 쫓아 그걸 손에 쥐었듯, 이 영화는 많은 이들의 입을 빌려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것이고, 희망을 쫓는 건 나쁜 게 아니며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결국에는 잘 될거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중간에 나오는 자장가 같은 곡, someone's waiting for you에서도 항상 작은 기도를 주머니에 넣어두라고, 그러면 분명 빛을 볼 거라고 믿음을 가지라고 하지 않던가. 마지막즈음 강풍에 날지 못하던 오빌이 뒤로 밀려 떨어져도 결국 날았다는 점에서 그런 교훈을 확고히 주고자한 인상이 강했다. 감성이 오글거림으로 무참히 짓밟히는 시대, 이런 교훈적인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몰매를 맞기 쉽상이지만 오랜만에 맛본 동심과 교훈이 담긴 인과응보식 이야기는 어릴적 내가 디즈니에 열광했던 이유를 상기시켜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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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글

211111:: 천 개의 파랑

 

 머리가 큰 뒤에 본 첫 SF 소설을 대차게 실패한 후, 요새 한국 SF에 희망이 보인다는 말을 들어 리디 셀렉트로 본 천 개의 파랑. 그 사람은 천 개의 파랑 외에도 많은 것들을 예시로 들며 희망을 보았다고 했지만 이후로 그 글을 찾을 수 없어 그나마 기억하고 있던 이 책을 골랐고, 덕분에 다정하면서도 수려한 문체에 한껏 먹먹해질 수 있었다. 누군가는 천선란 작가님이 인간을 싫어한다고 평했지만 나는 이 책으로 처음 봬서 그럴까, 인간은 모자르고 많은 악행을 저지르지만 한편으로는 다채롭기 때문에 좀 더 나은 길을 모색하고, 그런 사람들 덕에 세상은 조금씩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거 같았다. 그만큼 정말 따뜻하고 좋은 책이었다.

 

 하나의 실수로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 휴머노이드 콜리,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연골이 닳아 빠질 때까지 달려야했던 투데이, 남편을 여의고 기계를 믿을 수 없게 된 보경과 누구보다 자유로운 은혜, 하지만 그런 은혜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했던 연재까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모여 서로를 이해하고 그들의 시간을 존중하게 되기까지의 여정이 참으로 구슬프고 아름다웠다. 인간이 없으면 살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이제와서 자유를 주는 것도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는 말이나 상아가 없어진 코끼리를 보며 자신을 지키려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구절, 그리고 휴머노이드가 일상 생활에 녹아들 정도로 과학이 진보됐음에도 여전히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독자의 경각심을 깨우기 충분했다. 이야기 속에 사회 문제를 야기시키고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성장을 흡인력있게 묘사한 게 이 소설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를 다루며 본의아니게 독자들을 깨우치려는 양 작위적으로 서술하는 작가들을 많이 봐왔는데 천 개의 파랑은 그런 문제점을 거창하지 않게, 그렇다고 또 가볍지는 않게 다뤘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천 개의 파랑은 작가님의 메모장 한 구석에 있던 이 문장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 소설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잔잔한 여름의 오후같은 공기는 어쩌면 쉴틈없이 달려왔던 그들이, 혹은 너무 쉴틈없이 달린 결과 이제는 시간이 멈춰버린 그들이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나온 걸지도 모른다. 고작 이틀에서 14일 삶을 연장했다고 기적의 경주마라고 불리며 경주마들의 실태를 화두에 올린 투데이처럼 지속적으로 삶을 꾸려나가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도록. 

 

 달리는 것에 기쁨을 느끼던 투데이가 다시 행복을 찾을 동안 극중의 사람들도 직간접적으로 함께 달리며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했다. 그 결과 연재와 지수는 깨우침속에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보경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으며 은혜의 몸은 그의 마음 같이 좀 더 자유로워졌다. 투데이와 주연들을 이은 커넥션은 기수 휴머노이드 콜리였는데 정작 당사자는 천천히 달리는 그들의 등을 보며 마치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는 것마냥 마지막 선택을 하고 생을 마감한 것이 제일 안타까운 부분이다. 물론 콜리가 마주한 많은 인간— 즉 많은 파랑들이 본인에게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란 걸 안다. 연재는 콜리의 몸을 다시 고쳐줬고, 은혜는 몸이 불편하더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며 보경은 콜리가 아는 사람 중 제일 지혜로운 사람답게 그리움을 떨쳐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줬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본인이 선택한 일이라고 해도, 이제 그들 사이에 콜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면 슬퍼지기만 한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은 후 다시 제목을 들여다보면 참 많은 것이 느껴진다. 콜리의 마지막은 파랑파랑한 하늘이었는데, 내 눈가는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처럼 내 마음을 휩쓸고 떠나버린 콜리 때문에 붉어졌다. 읽던 도중 리커버리 이벤트로 문진을 주는 걸 알게 됐고,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고 싶어서 천 개의 파랑과 함께 신간인 나인도 함께 주문했는데 그것이 기대될 정도로 나에게는 정말 완벽한 결말이자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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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리움이란 기억을 포기하는 것. 현재 읽고 있는 천선란 작가님의 천 개의 파랑에서 보경은 콜리에게 그리움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가 다 사라질때까지 하나씩 떼어내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지나가버린 시간의 조각을 손에 쥐고 더 이상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상기하며 마음속에서 그리움이라는 하나의 꽃을 피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여인이 피어낸 그리움의 향기가 비강 깊이 자리하는 영화였다. 

 

 7일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동안 두 여인은 서로를 열망한다. 사랑의 불꽃이 불쏘시개를 태우며 화려하게 타오르고 사그라들 동안 걸린 시간은 고작 7일. 수도원은 자유로운 곳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는 곳이었다고 주장하는 마리안느와 자신은 억압당한 상태이기에 그런 수도원의 생활이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하는 엘로이즈. 마치 보색의 드레스처럼 평행선상에 서 있는 그들이 서로에게 추억이자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에는 더도말고 덜도말고 7일이면 충분했다.

 

 그들의 사랑을 인정해주지 않는 시대상, 딸 하나를 죽음으로 내몰았음에도 본인의 삶을 되찾기 위해 또 다른 딸을 희생시키는 어머니. 삐뚤어져버린 운명과 쏟아낼 수 없는 한탄은 대체 어디에 토로해야할까. 오갈데없는 분노를 끄기 위해 계속 물속으로 들어가는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와 사랑에 빠져 그 에너지를 사랑으로 변환시키고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결말에 사그라드는 게 어찌나 서글펐는지 모른다. 음악에 맞춰 감정이 고조되는 두 사람이나 자신을 억압하는 어머니가 잠시 집을 나가서야 진정으로 웃고 떠들 수 있게 된 엘로이즈 등 모든 연출이 좋았으나 유달리 그 장면이 눈에 아른거리는 이유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제목답게 불꽃으로 감정을 표현했기 때문일터다.

 

 불꽃 뿐 아니라 둘의 상황을 오르페우스랑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로 은유한 것도 감독이 신경 쓴 연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저승을 엘로이즈의 자유를 앗아가는 세상으로, 그리고 이승을 엘로이즈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을 때, 저승에서 이승으로 가는 조건은 마리안느가 그림을 완성하지 않는 것인데 결국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봐 에우리디케가 저승으로 갔듯이 마리안느가 그림을 완성해서 엘로이즈를 밀라노로 떠나보낸다. 그 연출이 다른 것들과 시너지를 일으켜 사람을 감동시키는 메타포가 됐다. 나가는 마리안느의 뒤에서 뒤를 돌아보라고하는 엘로이즈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오르페우스와의 이별을 생각한 에우리디케처럼 우리들은 더 이상 한 공간에 같이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한 걸까. 감상 중에 볼디님이 본인은 초상화가 사람의 영혼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배우셨다는데,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 초상화가 그들을 찢어놓는 매개체가 되다니 정말 불합리하고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자신의 작품을 보면 울컥하지만 주연 두 사람은 이별을 받아들이고 이제는 서로가 다른 선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인정했다는 점이 나를 더욱 더 슬프게 했다. 타오르는 그들의 사랑 때문일까 마리안느 앞에서 홀가분해진 엘로이즈의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지막 초상화에서 엘로이즈가 손가락이 28페이지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일까. 옛날, 마리안느가 연주해줬던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림에도 끝까지 자신이 마리안느랑 같은 공간에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 그가 마음에 갖고 있던 덩어리들을 하나씩 떼어내는 과정을 겪는 중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먹먹함에 잠식당해야했다.

 

 프랑스 영화답게 당혹스러운 장면이 몇 있었지만 여운이 길고 완성도가 높은 영화였다. 등장인물이 갑자기 당혹스러운 행동을 하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관객으로부터 유추하게끔 유도하는 건 프랑스 영화의 특징일까 아니면 아직 내가 많은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영상미와 음악, 연출이 크게 눈에 띄는 영화였기에 행동의 이유를 곱씹고 함께 영화를 보고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잔잔하고 좋은 영화였다… 하지만 다음주에는 이루어지는 사랑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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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글

211109:: 한강 작가의 문학의 역할


1:15:02부터

 

"만약 문학 속에 길이 있다면 그건 매끈한 표면에 그어진 표식으로서의 선이 아니라 우묵하게 파인 깊이를 가진 공간일 겁니다. 신문의 단신 한 줄, 거리에서 들은 한 마디 말, 사진 한 장, 한 조각의 꿈과 기억과 예감에서도 문학은 시작되고, 납작하게만 보이던 사건들과 사물들과 인물들 속에서 불꽃과 깊이와 내부를 상상하고 발견해내니까요. 그 깊이 아래에서 깨어남의 순간이 전기 스파크처럼 튀어 빛날 때, 읽고 있는 우리들의 내면에도 생명의 전류가 옮겨 흐르게 됩니다. 그 생명의 힘으로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새로운 우묵한 길이, 어떤 새로운 태도가 생겨나는 그 순간, 우리 삶은 미세하게 또는 결정적으로 변화하고 그 책을 읽기 전의 자신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깊이 없는 표면이 얼마나 쉽고 빠르게 혐오와 차별, 편견과 폭력을 향해 미끄러지는지 우리는 목격하고 경험해 왔습니다. 문학을 읽으며 우리 내면에 생겨나는 우묵한 길의 깊이는 그 미끄러짐에 힘껏 브레이크를 겁니다. 때로 우리가 절망과 환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져들 때도 그 울퉁불퉁한 내면의 길은 체념의 유속을 늦추고 문득 방향을 틀어 줍니다.

잃고 싶지 않은 가치가 위협받을 때에는 그걸 지키기 위해 때로 연대하기도 합니다. 이 행성에 깃들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의 운명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게 된 지금, 그 각성과 연결을 더 깊은 것으로, 더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드는 문학의 힘을, 그 힘이 우리를 밀고 나아가는 길을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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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게임

211107:: Forgotton Anne

 

 Forgotton Anne. 양말 한 짝, 지우개, 전구…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모든 물건들이 모이는 포가튼 랜드에서 집행자인 앤(Anne)을 조종하며 저항군의 실마리를 찾고, 이 세계의 진실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약간의 스팀펑크가 가미된 세계관에 오케스트라단이 연주한 BGM, 거기에 한장한장 그린 것 같은 섬세한 애니메이션의 콜라보가 플레이어의 눈을 사로잡지만 잊혀진 물건들이 모이는 세계에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를 생각하면 그리 밝지만은 않은 이야기라는 걸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게임의 섬세한 애니메이션과 그에 걸맞는 스토리, 웅장한 BGM과 플레이어를 트롤리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스토리가 좋았다. 특히 애니메이션이 어찌나 섬세한지 새 장소에 도착하면 앤이 치마를 두번 털거나 괜히 아니마가 충전된 장갑을 조정하고, 뛰다가 힘이 부칠 때는 헉헉대는 등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 플레이어가 질리지 않게 즐거움을 선사해줬다. 선택지는 결국 같은 스크립트로 이어지는 것 같지만 그것들을 모아 끝에 플레이어의 성향을 타로카드 식으로 보여주고, 수집품을 도입해 수집가들의 본능을 자극하는 등 소소한 재미까지 잘 챙겼다.

 

 반면에 조작이 엄청 불편했다. 그래도 로키와는 달리 한쪽 키보드에 전부 단축키를 모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wasd로 움직이고 q로 아니마 조작을, e로 상호작용을 하고 shift로 뛰며 ctrl로 날개를 펼치고 스페이스바로 점프를 하는데 날개(컨트롤)을 펼치고 a혹은 d를 눌러 방향을 정한 다음 달리며(쉬프트) 뛰는(스페이스바) 것은 진짜 여태까지 한 게임 중 힘들었던 조작 중 하나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한번 클릭해도 되면 그나마 쉬울텐데 컨트롤, 쉬프트, 방향키를 계속 꾹 눌러야하는 상황에서 타이밍에 맞춰 스페이스바를 누르는거다보니 쉽지가 않았다. 공장에서 타이밍을 맞춰 날개 달리기 점프를 해야 할 때는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왜 갑자기 점프 맵이 등장하는지… 후에 수집품을 위해 그곳을 다시 돌파할 때는 정말 울고 싶었다.

 

 그렇지만 엔딩을 하나 본 후 포탈을 이용해 일정 분기로 이동시켜 놓친 수집품을 모을 수 있게 한 점은 칭찬해주고싶다. 원래 한번 엔딩을 보면 또 스토리를 반복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수집품을 넘기기 일쑤였는데 그 포탈 덕에 어찌저찌 수집품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스킵과 빠른 대사 넘기기는 좀 더 확실하게 명시하는 게 어떨까 싶다. 애니메이션은 스페이스바를 꾹 누르면 스킵이 된다는 것과 설정에서 빠른 대사 넘기기가 꺼져있어 따로 만져줘야한다는 것을 수집품을 모으면서 알았다. 사실 빠른 대사 넘기기는 2배속을 해도 내 입장에서는 답답했다. 애들이 워낙 말이 많아서… 아예 대사도 스킵 버튼을 만들어줬다면 좋았을텐데.

 

 이 게임의 스토리에서 제일 안타까운 점은 서로 대적하는 본쿠와 피그가 앤을 끝까지 사랑했다는 점이다. 앤이 어째서 이 세계에 흘러들어왔는지를 생각하면 이 두 존재가 얼마나 값지고 사랑스러우며 반면에 둘 중 한명의 손만 잡아야하는 현실이 어찌나 안타까운지. 피그의 손을 잡았을 때는 본쿠와 앤이 껴안은 모습으로 크리스탈화가 되고, 본쿠의 손을 잡았을 때는 용서해달라는 앤에게 난 이미 너를 용서했다고 하는 피그의 대답이 유달시리 기억에 남아 더 가슴을 찡하게 했다.

 

 잊혀진 많은 것들을 다루는 이 게임도 언젠가는 내 기억속에서 잊혀질테고, 나의 스팀 라이브러리에만 저장될지도 모른다. 2018년에 나온 게임이니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졌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런가 마지막 도전과제의 제목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글을 써 앤과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해본다. 먼 미래의 내가 이 글을 보고 다시 그를 떠올릴 수 있도록.

 

 (여담이지만 이 게임은 츠미게가 아니라 최근에 한 스팀 할로윈 세일 때 산 게임이다. 다음 츠미게로 생각해둔 것은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였는데 그게 오빠의 스팀 라이브러리에 있어 오빠가 게임을 하고 있을 땐 내가 하지 못했고, 그 상황속에서 오빠가 최근 친구와 멀티 게임을 하는 데에 푹 빠져버렸기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았던 관계로 이 게임을 대신 하고 있었는데 하다보니 전부 다 깨버렸다(…). 할로윈 세일 때 그냥 라오루도 살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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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영상

211103:: 스탠바이, 웬디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를 전부 정주행 한 후 딱 좋은 시기라고 생각해 고른 스탠바이 웬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웬디가 스타트렉 시나리오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여정을 다룬다. 스타트렉과 연관성이 있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른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엄청 좋아서 시기를 잘 골랐구나 싶었다. 역시 이번에도 수요일 밤에는 시네마의 일원인 볼디님과 함께했다.

 

 영화 초반부 쯤 볼디님이 빨강과 파랑이 계속 함께 나오는데 이게 무슨 의미일까 여쭤보셨다. 처음에는 대조색을 그냥 쓴 걸까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별의 표면온도가 제일 높으면 청색, 제일 낮으면 적색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스타트렉의 특성을 생각하여 별의 표면온도를 이용해 웬디가 관심을 두는 것과 두지 않는 것을 색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실제로 그리 생각하며 보니 색이 주는 의미가 더 뜻깊었다.

 

 이와같이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스타트렉을 이용한 연출이 펼쳐진다. 웬디가 작품을 내는 시나리오 공모전 이름이 용감한 걸음인 것. 반은 외계인, 반은 인간이라 감정 처리를 어려워하는 스팍을 웬디의 페르소나로 이용한 것. 미지의 세계를 뚫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웬디의 여정을 스타트렉의 한 장면을 이용해 보여준 것이나, 웬디의 시나리오 지문을 나레이션으로 읊어주며 감정 묘사를 한 것. "함장님,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전진입니다." 라는 대사로 웬디가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웬디가 자신의 넘쳐흐르는 감정을 다스리는 다스리는 주문이 스타트렉에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기 전 대기명령으로 표현하는 스탠바이인 점 등. 이런 연출을 적절하게 잘 녹여내 영화를 보는 내내 즐거웠다. 작중내내 모든 차별을 없애는 스타트렉 정신을 잇고 있었고, 그를 표현하고 있었다. 웬디의 언니를 맡은 배우분이 스타트렉 다크니스에 나오는 캐롤인 점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는데 이 점들을 감안하여 볼 때 이 작품은 스타트렉을 향한 훌륭한 찬사 아닐까.

 

 마지막 부분에 웬디는 자신이 적은 스크립트를 읊으며 스팍을 자신으로, 커크를 언니로 표현하고는 "스팍은 마지막으로 친구의 눈을 바라봤다. 커크는 이제 스팍을 놔줘야 할 때란 걸 안다. 그가 인간의 심장을 찾도록. 끝. 에필로그, 모든 건 괜찮아질 것이다…(생략)"라고 말한다. 웬디에게 이 여정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내기 위한 길이자 자신은 홀로 설 수 있는 인간이며 독자적 객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통로였다. 자신을 아직도 돌봐줘야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언니에게 자신은 루비의 훌륭한 이모인 걸 알려주는 길. 여태까지 지켜왔던 많은 원칙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 기어코 성취하는 스토리는 볼디님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빙 둘러온 여정일지도 모른다. 성공 그 자체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그 외에도 세상에는 나쁜 사람만큼 좋은 사람 또한 있다는 걸 보여줘서 좋았다. 최근에 오은영 선생님의 금쪽 상담소에서 말하길, 아이에게 좋은 사람만큼 나쁜 사람도 있지만 살다보면 나쁜 사람을 만날 기회는 적다고 꼭 알려줘야한다고 했는데 괜시리 그 구절이 생각났다. 

 

 볼디님은 '상업적으로 쓰여지고 상업적으로 굴러가는 작품이어도 누군가 한명쯤은 그 내용을 계기로 삶을 바라볼 관점이 확립될 수 있다는 게 좋았다'고 하셨다. 말씀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작품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란다. 우리는 어쩌면 "현실과 가상은 구별한다"는 말 뒤에 숨어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보이는 것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많은 창작자들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작품이 끼칠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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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게임

211031:: 포켓몬스터 실드

 

 츠미게 밀기 두번째 포켓몬스터 실드. 사실 그 전 시리즈인 울트라 썬문과 오루알사를 하다가 말았음에도 다시 할 마음이 나지 않는지라 이제 포켓몬스터 시리즈로 감동과 재미를 느끼기 힘들구나 판단, 발매 전 평도 안 좋길래 그냥 4세대 리메이크를 기다리겠다는 마음으로 넘겼는데 어느날 언니가 유튜버 방송을 보고 재밌을 거 같다며 사왔다(그리고 그렇게 고대하던 4세대 리메이크는 실망만 안겨줬다). 그 김에 겸사겸사 해봤는데… 오? 생각보다 엄청 재미있었다.

 

 일단 편의성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굳이 포켓몬 센터로 안 가도 포켓몬 박스를 열 수 있다는 점이나 비전 머신으로 분류되던 풀베기, 공중날기, 파도타기 등이 없어져 스토리 엔트리를 내 마음대로 짤 수 있었던 점이나… 대신 갈 수 없는 길을 엑스트라들로 막아놨지만 이 두가지가 크게 개선돼 하는 데 불편한 점이 없었다. 전투에서 이기면 선두에 있는 포켓몬 말고 다른 포켓몬들도 조금이나마 경험치를 얻어 원활한 육성을 할 수 있는 건 덤. 기존 공중날기는 마을로만 이동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이번 작에서는 도로같은 곳에도 갈 수 있어 이동하는데 편리했다. 

 

 개선된 그래픽은 말할 것도 없다. 처음에는 젤다 야숨 같은 그래픽을 기대한 사람들의 실망한 목소리가 많았으나 직접 플레이해보니 이래저래 그래픽 면으로 엄청 신경쓴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적절한 카메라 각도 변화와 마을 컨셉에 따른 건물들,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사람들… 물론 전작에 비해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 적고, 들어가면 거진 대부분 다 똑같은 방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발전된 그래픽에 비해 NPC의 움직임이 단순하게 직선 방향 -> 회전 -> 직선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쉽기는 했다. 이게 인물 같이 비교적 작은 오브젝트면 크게 티가 안 나는데 자시안과 자마젠타 같이 큰 오브젝트는 티가 너무 나는지라 그 점은 더 개선돼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외에는 괜찮았다. 오히려 포켓몬스터 게임 자체가 가야하는 길이 정해져있고 순서도 정해져있어 젤다처럼 오픈월드 형으로 나오면 길치인 사람들은 정해진 출구를 찾느라 고생하겠구나 싶었다. 그 예로 길치 방향치인 나로서는 길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들어왔던 곳으로 나가고 나온 곳으로 들어가고… 아직도 와일드 에리어 길을 모른다.

 

 스토리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겠다 싶었다. 포켓몬스터 시리즈 주인공들의 나이대를 감안하면 큰 일에 어른들이 나서는 게 맞지만 이게 한편으로는 플레이어들을 스토리에서 배제하는 느낌이 강했다. 마지막 즈음에는 갑자기 무한다이노를 잡으라고 하는데 이게 뭔지 정확히 설명도 안 해줘서 그냥 잡았다. 어른들이 그렇게 나서되, 전에 무슨 일로 자신들이 출동해야됐는지 중간중간 말해주고 플레이어들이 모르고 한 행동이 어른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는 식으로 가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반대로 리드 카드를 통해 NPC들의 뒷사정을 알려준 건 좋았다. 사실 여태까지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챔피언이라는 자리를 게임상의 목표라고만 인지했지 큰 책임감이나 성취감은 느끼지 못했는데 챔피언인 형을 목표로 하는 소꿉친구와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라이벌, 자신의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해 챔피언을 목표로하는 라이벌 등 각자의 서사를 통해 그들에게서 승리하고 얻은 챔피언의 자리가 얼마나 값진지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듯했다. 메인 스토리가 끝난 후, 목표를 잃은 채 홀로 동떨어진 느낌을 받은 호브와 페어리 관장을 맡은 비트, 그리고 오빠에 이어 악타입 관장을 맡은 마리의 성장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의 서사도 잘 마무리 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갓겜이라고 칭송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발매 전 나왔던 모멸찬 시선을 받을 만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는 내내 남의 생각에 편승하지 말고 뭐든 경험해보는 것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취향과 줏대를 구축해나가는 길이라 느꼈다. 우리는 남의 평가에 휘둘려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걸까. 이게 참 머리로는 알아도 실천하기가 어렵다.

 

 갑옷섬은 일찍 가는 게 여러모로 좋다는 조언을 얻어서 스토리 도중에 다 깼고, 남은 컨텐츠가 배틀타워와 얼음왕국 뿐인데 배틀타워 식의 컨텐츠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지라 선뜻 하기가 어렵다(얼음 왕국은 귀찮다). 일단 다른 츠미게를 하다가 생각이 나면 시도해볼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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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영상

211027:: 스타트렉 비욘드

 

 3부작…은 아니지만, 현재 나온 스타트렉 리부트 중 마지막 스타트렉 비욘드. 이번에도 역시 수요일 밤에는 시네마 일원인 볼디님과 함께했다. 전편에는 불필요하게 알몸의 여성을 보여줘서 불편했는데 감독이 바뀌어서 그런가 이번에는 그런 장면이 싹 다 없어져서 좋았다. J.J 에이브럼스는 제작만 맡아주길….

 

 전체적으로 과거의 잔재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만 결국 미래로 나아간다는 스토리 라인이 좋았다. 크롤(과거 사람)이 물리쳐야 할 적으로 나온 점이나 과거의 함선이 행성을 빠져나가는 데에 도움이 됐다는 점이나…. 그 사이사이에 게이 부부인 술루를 보여주고 중동 여성을 준장으로 올리는 등 약자들을 자연스레 보여주며 스타트렉 정신(볼디님께 배웠다)을 이어가는 점은 더할나위 없이 최고였다. 아마 유달리 조명을 받았던 술루(동양인)와 우후라(흑인)의 조합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싶다. 2021년인 지금도 이만큼 다양한 인종이 활약한 메이저 영화는 찾기가 힘든데 2016년에 개봉한 영화가 이걸 해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3편에서는 술루와 우후라뿐만 아닌 색다른 조합이 많이 나왔다. 본즈와 스팍, 커크와 체코프… 전편에서는 두각을 드러나지 않았던 조합들인데 함께하는 그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비춰주면서 나온 적은 없어도 이들 또한 신뢰로 뭉친 동료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마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그들은 서로 상호 작용을하며 신뢰와 정을 쌓아나갔겠지. 그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장소에 함께할 수 없었다는 현실에 아쉬운 마음도 든다.

 

 좋은 점을 꼽는 데에는 추모 방식도 빠질 수 없다. 커크의 아버지 사건 이후로 구명 포드 이름이 켈빈 포드가 된 것도 나름의 추모 방식이자 사건을 잊지 말자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아 좋았는데 실제 배우인 레너드 니모이의 사망을 추모한 것뿐만 아니라 주요 인물인 스팍의 가야할 길이자 결심이 됐다는 점이 리부트 제작진들이 보내는 예우이자 공경처럼 보였다. 1편을 보며 오리진의 배우가 리부트의 스타트렉 주연들을 도왔다는 점이 시리즈를 향한 존경의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완벽한 끝을 맺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이해 못한다고 폄하하는 건 현명하지 못해."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살아가게 해." "불가능 속에서 희망을 찾아야한대." "살생을 반복하느니 사람을 구하고 죽겠어. 내가 태어난 세상은 그래." 등 심금을 울리는 대사들도 정말 많았다. 커크가 울린 엔진음을 듣고 결의를 다지는 제이라나 크롤이 유리 조각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외관적으로 인간성을 잃은 본인을 확인했음에도 파괴적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얼마나 바닥까지 떨어졌는지 알려주는 연출 또한 환호를 자아냈다(이 두 연출의 설명은 볼디님이 적어주신 걸 그대로 가져왔다. 그만큼 좋았기 때문에…). 그러면서 "망치면 저 혼자 책임지기 싫거든요" "우라지게 고맙지만 그럴 수 없어."등의 대사로 사람을 미소짓게 만드는 개그도 좋았다. 역시나 빠지지 않는 패드립(…)도 나름 스타트렉다웠다. 볼디님은 재미가 전편보다는 덜할 수 있지만 본인은 이게 제일 좋았다고 하셨는데 나는 재미도 완성도도 3편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포스터에 인류를 구하기 위해 불가능의 한계를 넘다라고 적힌 문장이 오늘따라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엔터프라이즈호의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에 절망하지 않고 어떻게든 헤쳐나가 난관을 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지의 세계에 던져진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신념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이 참으로 멋져보이는 밤이었다. 4편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무튼 모든 사람들에게 장수와 번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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