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가 큰 뒤에 본 첫 SF 소설을 대차게 실패한 후, 요새 한국 SF에 희망이 보인다는 말을 들어 리디 셀렉트로 본 천 개의 파랑. 그 사람은 천 개의 파랑 외에도 많은 것들을 예시로 들며 희망을 보았다고 했지만 이후로 그 글을 찾을 수 없어 그나마 기억하고 있던 이 책을 골랐고, 덕분에 다정하면서도 수려한 문체에 한껏 먹먹해질 수 있었다. 누군가는 천선란 작가님이 인간을 싫어한다고 평했지만 나는 이 책으로 처음 봬서 그럴까, 인간은 모자르고 많은 악행을 저지르지만 한편으로는 다채롭기 때문에 좀 더 나은 길을 모색하고, 그런 사람들 덕에 세상은 조금씩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거 같았다. 그만큼 정말 따뜻하고 좋은 책이었다.
하나의 실수로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 휴머노이드 콜리,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연골이 닳아 빠질 때까지 달려야했던 투데이, 남편을 여의고 기계를 믿을 수 없게 된 보경과 누구보다 자유로운 은혜, 하지만 그런 은혜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했던 연재까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모여 서로를 이해하고 그들의 시간을 존중하게 되기까지의 여정이 참으로 구슬프고 아름다웠다. 인간이 없으면 살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이제와서 자유를 주는 것도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는 말이나 상아가 없어진 코끼리를 보며 자신을 지키려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구절, 그리고 휴머노이드가 일상 생활에 녹아들 정도로 과학이 진보됐음에도 여전히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독자의 경각심을 깨우기 충분했다. 이야기 속에 사회 문제를 야기시키고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성장을 흡인력있게 묘사한 게 이 소설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를 다루며 본의아니게 독자들을 깨우치려는 양 작위적으로 서술하는 작가들을 많이 봐왔는데 천 개의 파랑은 그런 문제점을 거창하지 않게, 그렇다고 또 가볍지는 않게 다뤘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천 개의 파랑은 작가님의 메모장 한 구석에 있던 이 문장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 소설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잔잔한 여름의 오후같은 공기는 어쩌면 쉴틈없이 달려왔던 그들이, 혹은 너무 쉴틈없이 달린 결과 이제는 시간이 멈춰버린 그들이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나온 걸지도 모른다. 고작 이틀에서 14일 삶을 연장했다고 기적의 경주마라고 불리며 경주마들의 실태를 화두에 올린 투데이처럼 지속적으로 삶을 꾸려나가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도록.
달리는 것에 기쁨을 느끼던 투데이가 다시 행복을 찾을 동안 극중의 사람들도 직간접적으로 함께 달리며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했다. 그 결과 연재와 지수는 깨우침속에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보경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으며 은혜의 몸은 그의 마음 같이 좀 더 자유로워졌다. 투데이와 주연들을 이은 커넥션은 기수 휴머노이드 콜리였는데 정작 당사자는 천천히 달리는 그들의 등을 보며 마치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는 것마냥 마지막 선택을 하고 생을 마감한 것이 제일 안타까운 부분이다. 물론 콜리가 마주한 많은 인간— 즉 많은 파랑들이 본인에게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란 걸 안다. 연재는 콜리의 몸을 다시 고쳐줬고, 은혜는 몸이 불편하더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며 보경은 콜리가 아는 사람 중 제일 지혜로운 사람답게 그리움을 떨쳐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줬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본인이 선택한 일이라고 해도, 이제 그들 사이에 콜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면 슬퍼지기만 한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은 후 다시 제목을 들여다보면 참 많은 것이 느껴진다. 콜리의 마지막은 파랑파랑한 하늘이었는데, 내 눈가는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처럼 내 마음을 휩쓸고 떠나버린 콜리 때문에 붉어졌다. 읽던 도중 리커버리 이벤트로 문진을 주는 걸 알게 됐고,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고 싶어서 천 개의 파랑과 함께 신간인 나인도 함께 주문했는데 그것이 기대될 정도로 나에게는 정말 완벽한 결말이자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