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움이란 기억을 포기하는 것. 현재 읽고 있는 천선란 작가님의 천 개의 파랑에서 보경은 콜리에게 그리움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가 다 사라질때까지 하나씩 떼어내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지나가버린 시간의 조각을 손에 쥐고 더 이상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상기하며 마음속에서 그리움이라는 하나의 꽃을 피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여인이 피어낸 그리움의 향기가 비강 깊이 자리하는 영화였다.
7일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동안 두 여인은 서로를 열망한다. 사랑의 불꽃이 불쏘시개를 태우며 화려하게 타오르고 사그라들 동안 걸린 시간은 고작 7일. 수도원은 자유로운 곳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는 곳이었다고 주장하는 마리안느와 자신은 억압당한 상태이기에 그런 수도원의 생활이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하는 엘로이즈. 마치 보색의 드레스처럼 평행선상에 서 있는 그들이 서로에게 추억이자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에는 더도말고 덜도말고 7일이면 충분했다.
그들의 사랑을 인정해주지 않는 시대상, 딸 하나를 죽음으로 내몰았음에도 본인의 삶을 되찾기 위해 또 다른 딸을 희생시키는 어머니. 삐뚤어져버린 운명과 쏟아낼 수 없는 한탄은 대체 어디에 토로해야할까. 오갈데없는 분노를 끄기 위해 계속 물속으로 들어가는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와 사랑에 빠져 그 에너지를 사랑으로 변환시키고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결말에 사그라드는 게 어찌나 서글펐는지 모른다. 음악에 맞춰 감정이 고조되는 두 사람이나 자신을 억압하는 어머니가 잠시 집을 나가서야 진정으로 웃고 떠들 수 있게 된 엘로이즈 등 모든 연출이 좋았으나 유달리 그 장면이 눈에 아른거리는 이유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제목답게 불꽃으로 감정을 표현했기 때문일터다.
불꽃 뿐 아니라 둘의 상황을 오르페우스랑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로 은유한 것도 감독이 신경 쓴 연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저승을 엘로이즈의 자유를 앗아가는 세상으로, 그리고 이승을 엘로이즈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했을 때, 저승에서 이승으로 가는 조건은 마리안느가 그림을 완성하지 않는 것인데 결국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봐 에우리디케가 저승으로 갔듯이 마리안느가 그림을 완성해서 엘로이즈를 밀라노로 떠나보낸다. 그 연출이 다른 것들과 시너지를 일으켜 사람을 감동시키는 메타포가 됐다. 나가는 마리안느의 뒤에서 뒤를 돌아보라고하는 엘로이즈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오르페우스와의 이별을 생각한 에우리디케처럼 우리들은 더 이상 한 공간에 같이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한 걸까. 감상 중에 볼디님이 본인은 초상화가 사람의 영혼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배우셨다는데,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 초상화가 그들을 찢어놓는 매개체가 되다니 정말 불합리하고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자신의 작품을 보면 울컥하지만 주연 두 사람은 이별을 받아들이고 이제는 서로가 다른 선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인정했다는 점이 나를 더욱 더 슬프게 했다. 타오르는 그들의 사랑 때문일까 마리안느 앞에서 홀가분해진 엘로이즈의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지막 초상화에서 엘로이즈가 손가락이 28페이지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일까. 옛날, 마리안느가 연주해줬던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림에도 끝까지 자신이 마리안느랑 같은 공간에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 그가 마음에 갖고 있던 덩어리들을 하나씩 떼어내는 과정을 겪는 중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먹먹함에 잠식당해야했다.
프랑스 영화답게 당혹스러운 장면이 몇 있었지만 여운이 길고 완성도가 높은 영화였다. 등장인물이 갑자기 당혹스러운 행동을 하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관객으로부터 유추하게끔 유도하는 건 프랑스 영화의 특징일까 아니면 아직 내가 많은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영상미와 음악, 연출이 크게 눈에 띄는 영화였기에 행동의 이유를 곱씹고 함께 영화를 보고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잔잔하고 좋은 영화였다… 하지만 다음주에는 이루어지는 사랑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