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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글

【221213】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나만이 아는 나의 길고 다채로운 역사 속에서 나는 남의 입으로 함부로 요약될 수 없는 사람이며, 미안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이상으로 행복하다."

- p.86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막연하게 바라는 삶이 있다. 비혼인 채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같은 동네에 살거나 같은 단지에 사는 것. 나는 집안에 인기척이 있는 걸 좋아하니 마음 맞는 사람을 룸메이트로 들여 즐겁게 사는 것도 재밌겠다. 그러면 인생이 정말 즐거워질 거 같았다. 남의 사랑 이야기는 괜찮지만 내 연애에는 큰 관심이 없고, 누군가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음을 깨달은 이후부터 내 삶의 방향은 오직 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아꾸랑 샤미처럼 인간 친화적인 반려 동물과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둘이 오래오래 살아 그때도 함께하면 더더욱 좋을테고 말이다. 그런 내 삶을 이룬 사람이 있다. 바로 이 책을 쓴 김하나 작가님과 황선후 에디터님이다. 

 

 에세이를 왜 읽는지 이해 못할 때가 있었다. 김소영 작가님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재밌게 읽었음에도 그랬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기 때문에 에세이라기 보다는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해 쓴 책 같았고, 다른 이의 삶으로 무언가를 얻기에는 힘들 거 같았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무언가를 얻은 것 자체가 에세이의 쓸모이거늘.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나는 그랬다.

 

 하지만 다산다난한 삶을 함께 헤쳐나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에세이는 비문학이지만 문학과 결을 같이한다는 점을 알았다. 내가 이루고픈 삶의 방향을 자신의 경험을 곁들어서 좀 더 인간적이고 따스하게 제시해주는 것이다. 같은 비문학에도 지식보다는 지혜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았을 때, 얼마나 신이 나던지. 그 사소한 깨달음이 나를 한단계 더 올려준 기분이었다.

 

 많은 사랑 이야기를 접하지만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나는 사랑보다는 우정을, 애인보다는 친구를 택할 것이며, 실제로도 그 소중하지만 마냥 무겁지만은 않은 관계가 좋다. 누군가의 유일이 되거나 그 삶을 책임 진다는 건 나 자신도 못챙기는 나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다. 나에게는 대단해보이는 그런 길을 택한 사람이 있으면 나같은 사람도 있다. 이토록 삶의 모양은 제각각이고, 추구하고자하는 방향도 다르다. 애초에 이 지구에 약 80억이 있다는데, 그걸 하나로 뭉치고 그것이 '정상'이라며 강요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아닐까. 어서 빨리 생활 동반자법이 생겼으면 좋겠다. 이 책을 보고 그 마음이 더 절실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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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나는 혼자라서 못 하는 일이 있는 게 싫어서 뭐든 혼자서도 해왔고 또 꽤 잘 해 왔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상에는 여럿이 해야 더 재밌는 일도 존재한다는 걸.

 

p.38) 남의 일인데 어째서 맡겨놓은 듯이 계획이나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걸까? 결혼 하지 않은 여성들은 어리고 만만하다는 이유로 종종 이런 주제 넘은 참견의 대상이 된다.

 

p.85)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게 내 가치를 높여주거나 기분을 낫게 해주지 않으니까.

 

p.86) 결혼 안 한 나를 두고 무슨 결격 사유가 있다는 양 비아냥거리거나 내가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둘 말고도 많았다. 백번 양보해서 그게 사실이라 쳐도 그런 얘기를 사람 앞에다 두고 할 수 있는 무례함이 놀랍고, 그런 무례한 사람들도 결혼을 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p.87) 나만이 아는 나의 길고 다채로운 역사 속에서 나는 남의 입으로 함부로 요약될 수 없는 사람이며, 미안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이상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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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7】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당신도 마법소녀가 될 수 있고 그 사실에 만족하기를. 당신은 종말론만 있고 맞서 싸울 이는 없는 이 암울한 세계를 밝힐 촛불이다. 그리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 168p

 

 조건에 따라 여자들이 능력을 각성하는 세계. 거기에는 마법소녀가 있고 대한민국에는 그들을 관리하는 지부가 있다. 그런 특별한 자들이 판을 치는 곳에서 주인공은 리볼빙으로 늘어난 카드 빚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 그의 앞에 예언의 마법소녀가 나타나 말한다. 당신은 특별한 마법소녀라고, 지구에 닥칠 멸망을 막을 수 있다고.

 

 박서련 작가의 책은 더 셜리 클럽 이후 1년만이다. 한 커뮤니티에서 많은 이들의 추천을 보고 빌려봤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고 완독은 했으나 무심하게 덮은 기억이 있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는 아는 지인이 내가 좋아할 거 같다며 추천해준 책으로, 나 역시도 '마법소녀'라는 제목에 크게 끌렸기 때문에 기대했던 바가 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다지 큰 울림을 받지 못했다. 여러 소재나 그를 뒷받침하는 곁가지들은 내 취향이 확실했으나, 등장인물의 관계나 이야기의 깊이가 너무 얕아 발목에 닿을까말까한 깊이의 시냇물을 차박차박 걷다 큰 바다를 마주하지도 못한 채 끝난 기분이었다. 지구에 닥칠 재앙과 그 징조의 정체, 그리고 이 소재에 함의된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도 좋았지만 그게 단점을 상쇄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쉬운 작품으로 남았다. 이쯤되면 이 작가와 안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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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사람이 살아 있는 데에는 돈이 들어……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린 것 같아.

 

p.83) 이번에야말로 내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된 줄 알았는데, 단순한 쓸모를 넘어 너무도 중요하고 유일해서 대체불가한 존재가 된 줄 알았는데. 내가 시간의 마법소녀일지도 모른다는 걸 의심조차 하지 않았는데.

모든 걸 망친 건 아로아가 아니라 나였다.

 

p.166) 스물아홉에도 마법소녀가 될 수 있다면 시계 디자이너가 되기에 늦은 나이도 딱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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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긴긴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 p.120

 

 생명이 살아갈 힘을 얻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부나 명예, 직위 또한 중요하지만 노래 전쟁터에서 이선희가 말했듯 제일 중요한 건 사랑일테다. "작지만 위대한 사랑의 연대". 띠지에 적혀있는 이 문장은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이의 삶을 관통한다. 다리나 눈이 불편한 친구를 위해 그와 짝이 되어 발을 맞추고, 악몽을 꾸는 친구를 위해 이야기를 하염없이 읊는 등 그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다. 몸속에 차곡차곡 쌓인 그 감정들은 등장인물이 좀 더 옳은 길을 가게 방향을 틀어주고 삶을 지속하게 한다. 비록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그들을 향한 복수심에 불탈지라도. 사랑은 그만큼 위대하다.

 

 자의적 타의적으로 이별을 거듭한 노든의 삶은 겨울과 같다. 서늘하고 날카로우며 생명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쌓인 눈마냥 잔잔한 분노를 품고 있으며, 가슴속에 똬리를 튼 복수심은 노든을 파괴적으로 만든다. 그런 상황속에서 노든을 거쳐간 많은 이들의 사랑은 이 추위를 이겨내라며 전해주는 햇살과 같다. 언젠가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길 바라며, 노든이 아무리 내치고 경계하고 침묵해도 그들은 꾸준히 햇빛을 쬐어 흰 풍경이었던 노든의 마음에 푸르른 초목을 만든다. 그리고 그 사랑이 돌고 돌아 펭귄에게 닿는 순간 노든은 말한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라고. 마치 코끼리 유치원을 벗어날지 말지 고민하는 노든에게 할머니 코끼리가 그리 말했던 것처럼.

 

 서글픈 긴긴밤이 지속돼도 서로가 있기에 버틸 수 있고, 내 안에 사랑이 있는한 나는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었다. 화자가 누구인지 뒤늦게 알려주는 서술 방식도 특이해서 내 안에 긍정적으로 자리잡았다. 겨울에 읽기 딱 좋은 작품이라는 평을 봐서 다행이다. 덕분에 나 또한 이 겨울을 잘 이겨낼 온기를 얻은 기분이니. 더러운 웅덩이 속에서도, 홀로 견뎌야하는 긴긴밤에서도 밝은 빛을 찾을 일이 분명 올 것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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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 )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p.16 )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p.60 )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p.65 ) 노든은 목소리만으로 치쿠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발소리 만으로 치쿠가 더 빨리 걷고 싶어 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p.71 ) 언제나 그랬다. 노든은 옛날 기억에 사로잡힐 때마다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노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p.84 )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어. 왜냐면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잖아.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해."

 

p. 94 )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p. 101 ) "날 믿어.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게다가 코뿔소가 키운 펭귄인데,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p. 120 )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 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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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1】이제 그런 말은 쓰지 않습니다.

 

혐오의 세상에서 한 인간의 탄생은 '잼민이'를 거쳐 '꼰대'로 살다 '틀딱'이란 소리를 들으며 막을 내린다. 이만큼이나 혐오가 쉽다.

 SNS는 참 장단점이 뚜렷하다. 자극적이고 거짓된 정보가 판을 치지만 좋은 책이나 영화를 추천받고 싶을 때는 이만한 게 없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번에도 트위터에서 알티를 타 보게 된 책. '성숙한 어른이라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언어필터링'이라는 말이 유달리 크게 다가와 이 책을 골랐다.

 

 요즘 세상은 많이 천박해졌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상이나 현실에서나 행동과 말을 막 하고 진지한 조언을 거부하며 자극만 쫓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런 건 또 쉽게 옮는지라, 마치 유행하는 바이러스마냥 여기저기 퍼지고 그게 위트있고 재치있는 것마냥 유행을 타는 세상. 이런 시류에서 살아남아보고자 내 자신을 많이 검열하지만, 나또한 사람인지라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누군가를 상처줄 때가 있었다.

 

 이 책은 그런 말들을 한 곳에 정리했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편, 본래 알고 있던 단어 또한 있었는데 역시 두루뭉실하게 생각으로 남기는 편보다는 글로 정리한 것이 체감이 잘 되는구나 생각했다. 나 또한 무심결에라도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기에, 이제부터라도 혐오의 말을 줄이고, 책 내용을 상기하며 그 말을 뱉은 사람을 지적해볼까한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상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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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문장은 독백이나 혼잣말로 남겨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문장을 대화로 완성해준 이에게 듣는 불편까지 감수하라는 건, 다소 무책임하고 나태한 태도이다. 심지어 한 명이 아니라 백 명, 혹은 수천 명, 한 국가나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일해야 한다면, 당연히 상당수가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단어로 말하는 배려가 더욱 필요하다. 발화 속 메시지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듣는 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화자가 한 번 더 생각을 거치는 것으로 청자가 편할 수 있다면 그 번거로움은 감수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p.7

 

 자신의 무례를 인지하는 사람은 남의 마음에 대형 사고를 치지 않는다. 차별 단어를 애용하는 모난 습관을 버리기만 해도, 안전한 대화가 가능하다. 더불어 나도 잘해야 하겠지만, 남과 함께 잘해야 언어의 사고를 큰 폭으로 줄일 수 있다. 이건 많은 이들이 함께할수록 좋다. 차별 단어에 불편한 사람이 늘어날수록, 차별에 불편한 사람은 줄어드니까. 그리하여 모두가 불편해할수록 단 한 명도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불편이 만드는 편안을 다 함께 느낄 수 있길 바라며. /p.9

 

 즉 우리가 갓 무언가를 시작한 어리숙한 어른을 데려다 '어린이'에 비유하는 행위는 은연중에 '어른은 항시 성숙하고, 어린이란 그와 반대로 덜 자란 어른에 불과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회 모두가 어린이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외치더라도, 실제로 우리가 뱉는 언어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이다. /p.17

 

우주처럼 풍부한 어린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작고, 귀엽고, 미숙한 존재로 대상화할수록 고독해지는 자는 어른이다. 반대 선상에 놓인 이들을 두어다 한쪽은 미숙하고 한쪽은 성숙하다 일컫으니, 과거보다 완성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어른의 부담감만 늘어날 뿐이었다.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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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3】노랜드

 

오고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모든 걸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선란 작가님의 신작, '노랜드'. 총 10편의 단편을 묶어 낸 단편집이다. 단편집은 다 좋지만, 완독 후에는 유달리 인상깊게 본 몇 작품만 기억에 남는 점이 참 아쉽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이라 이번에는 다를까 했는데 아쉽게도 내 기억력은 그런 걸 판가름하지 못하나보다. 

 

 10개의 단편들은 각각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별'과 접목돼있다. 그게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무언가와 '이별'하거나 해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주인공은 이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거나 진실을 마주한다. 이별이 왔을 때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각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선택을 했기에 보는 재미가 있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이름 없는 몸과 우주를 날아가는 새. 아무래도 나는 사랑(포괄적 의미)이 확실히 드러나는 게 좋은가보다. 특히 이름 없는 몸은 시골에 사는 한 총각에게 시집 온 베트남 여성과 그 자녀를 전제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중간에 잘 못보는 묘사가 있어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서도.

 

 후기에는 이유없이 살아가자는 말을 너무 길게 한 것 같다는데, 삶의 이유를 계속 찾는 나에게는 그 긴 이야기들이 좋았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문체로 볼 수 있어 영광이다. 앞으로도 천선란 작가님이 그려낼 행복과 사랑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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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는 것도, 그리운 것도, 찾는 것도, 후회하는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증오하는 것도 아닌 마음. 설명할 수도 표현할 방법도 없는 마음. - 28p

 

 

 사람들은 나열된 우리 모습만 보고 불쌍한 인생이라고 생각할 거 아냐. 그게 아니라는 거, 우리한테도 우리의 삶이 있고 우리가 택한 삶이고 내 인생 멋지다는 거 보여줘야지. -50p

 

 "하지만 아직 마지막은 오지 않았잖아요. 동생이 살아만 있어준다면 괴물이 되어도 좋고 우주에 나가도 좋아요. 허락했을 거예요. 적어도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동생이 있다는 거니까. 보이지는 않겠지만요. 그렇게라도 살아만 있어주면 됐어요. 어떤 모습으로든, 어디에서든." -54p

 

저는 인간이 바키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두 번 다시 어떤 것도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79p

 

 [함장님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때때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앗아갑니다.] -104p

 

 "떠나야 하고 소멸되어야 할 인간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건 가장 잔인한 일이야. 그런 식으로 이별을 미뤄봤자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물론 떠나는 사람은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그러니까 푸코, 너는 보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보내줘. 그게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는 거니까." -116p

 

 선이 전부 말해주었다. 선은 나를 나로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정말 존재하지 않았다면 선은 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 160p

 

 나는 왜, 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왜 내게 공간을 내어주느냐고. 그러자 언니는 하나의 세계를 붕괴시키려면 하루빨리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야 하고, 그 세계는 사람과 사람이 만낫을 때에 만들어지므로 네가 살아온 세계가 빨리 붕괴되기를 원해서 그런다고 대답했다. -1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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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만화

【220920】나와 너의 소중한 이야기 (完)

 옆자리 괴물군을 그렸던 로비코 선생님의 신작. 각자의 사정으로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들이 모여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던 전작에 비해 이번작은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았다.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들이 모여 영향받고 성장하는 건 같았으나, 주연 커플이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큰 감점 포인트가 됐다.

 

 특히 남자 주인공…. 연애를 논리적으로 따박따박 재고, 여자는 이래서 안된다는 등 귀찮다는 등 말하는 게 어찌나 재수가 없던지…. 사이버상에 자주 보이는 인셀남 같아서 괴로웠다. 그에 비해 여주는 나름 귀엽고 괜찮기는 했는데…. 일본은 왜 여자가 먼저 남자를 스토킹 하는 걸 개그 소재로 삼는 걸까? 여주가 남주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남주가 먹고 버린 캔을 모으고 빨대를 모으고 도촬을해서 방에 붙여놓고하는 게 나에게는 개그 포인트가 아니라 징그럽게 다가왔다. 실제 여성이 주로 피해보는 범죄를 성별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개그가 된다면 많이 그렇지 않나….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월간순정 노자키군에서도 그러는 걸 보면 일본에 깔린 정서적인 가치관, 그들에게 통하는 개그 포인트가 맞는 거 같다.

 

 전작 때문에 기대한 걸 감안해도 많이 아쉬웠던 작품. 유일하게 서브 커플이 귀여웠다는 점이 위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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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만화

【220917】메달리스트 1~2권

 예전에는 만화책하면 곧잘 순정 만화를 읽고는 했는데. 요즘은 이렇게 러브라인이 주가되지 않고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는 이야기가 좋다. 특히 고깔모자의 아틀리에 같이 어린애가 주인공이라면 더더욱 응원하고 싶어진다. 메달리스트 또한 그랬다. 다소 강압적인 어머니의 만류에 제 뜻 한번 펼치지 못했던 작은 아이가 그럼에도 스케이팅이 하고 싶어서 몰래 스케이터장에 들어가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제대로 된 교육 한 번, 제대로 된 경기 한 번 나가지 못한 채 꿈을 위해 조그만한 노력을 하는 게 얼마나 장하고 안타깝던지. 마찬가지로 꿈을 이루지 못한 어른인 츠카사 선생님과의 케미와 대비가 가슴에 사무쳤다.

 

 사실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어린아이를 꾸준히 훈련시켜 올림픽 선수로 내보내는 데에 회의적이다. 아무리 인생사 마음대로 되지 않고 노력한 만큼 돌아오지 않는다지만, 어릴 때부터 그런 걸 경험해야할까 싶어서…. 작중에서도 말했다시피 올림픽 선수가 되는 아이는 극소수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가. 재미있고 연출도 좋았지만 주조연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명받지 못한 엑스트라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이노리가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시험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건 결국 재능이 있다는 얘기고, 그런 애가 노력까지하니 재능 없는 아이는 뒤로 밀려나고 절망에 빠질 수밖에. '그런 애를 신경 쓸 시간에 우리 애나 신경썼으면 좋겠다'는 한 학부모의 말이 너무하다싶다가도 무슨 마음인지는 알 거 같아 씁쓸했다. 내가 예체능을 해서 더 그런걸지도….

 

 아이들은 전부 개성있고, 착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나에게도 많은 동기부여가 됐지만, 동시에 여기에 정말 올림픽에 나가는 애는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에 뒷목을 쓸어넘겼다. 아직 2권까지밖에 안나왔고, 현실을 상기시키는 대사가 자주 나오는 걸 보면 분명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 중 하나는 그런 성장통을 겪겠지. 그때 내가 울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가슴 한켠이 시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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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만화

【220916】바다를 달리는 엔딩크레딧 1권

  65세, 젊지는 않은 나이에 영화 촬영이라는 꿈을 안고 대학에 들어간 할머니, 우미코의 이야기를 담은 책 '바다를 달리는 엔딩 크레딧'.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성황을 이루는 만화계에서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이 특이했다. 배우자를 잃고 홀로 삶을 꾸려나가던 와중에 삶의 열의를 불태울만한 계기를 만나게 된 것도.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종종 보이는 늦깍이 대학생들의 이야기. 그런 걸 보면 도전과 열정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오래 산 분들도 이제야 재능을 찾거나 관심있는 분야에 뛰어드는데 내가 이리저리 방황하며 뭘로 먹고 살아야할까 고민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거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이래서 다양한 이야기가 세간에 나와야하는구나 싶다.

 

 책을 읽으며 체력이나 금전적인 문제로, 혹은 세간의 인식 때문에 대학 문을 두드리기를 꺼려하는 노인분들이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대학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거나 문화센터에 가서 무언가를 꾸준히 배우고 사람과 접촉하며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았음 좋겠다고. 그렇게 만들어낸 결과물에 뿌듯함을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이 계속 이어지면 좋을텐데. 여러모로 다음 권도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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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글

211125::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뇌출혈, 뇌종양, 뇌졸중, 심장마비… 누구나 몸이 보내는 사소한 신호를 눈치채지 못하면 단숨에 목숨을 앗아가는 이 병들을 무서워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사람의 사인이 심장마비였다는 걸 안 이후에는 더더욱 이런 병들이 무서웠다. 어제까지만해도 건강해보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런 질환을 알아보고 탐색하여 대비할 시간은 갖지 않았다. 미지의 공포는 미지로 두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나는 아직 이런 일을 겪기에는 어리다는 안일함 때문일까. 사실 이 책도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산 게 아니라 SNS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길래 구매했다가 한참이나 묵혀뒀다. 지금은 더 늦기 전에 이 책을 읽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는 저자이자 뇌과학자인 질 볼트 테일러가 37세에 맞이한 뇌졸중으로 인해 자신의 뇌가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하고 8년의 회복 기간을 거치며 느낀 바를 서술한 에세이다. 사실 이런 과학 분야 책을 제대로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인데, 읽는 내내 국어 모의고사 비문학을 보던 학창시절이 떠올라 이쯤이면 책을 잘 읽는 거 아닐까 자부하던 나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줬다. 어려운 책은 아니다. 다만 일반인 입장에서는 생소한 단어들이 꽤 많이 나온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이런 용어들을 서슴없이 뱉을 정도의 지식인이 뇌 혈관이 터졌다고 도움을 청하기까지 오래걸리고 수술 후에도 갓난아기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배웠다는 점이 말이다. 처음에 저자가 뇌졸중에 걸렸을 때 한 생각들이 크리피했기에 아무 생각없이 '이과생들은 전부 이런 걸까'하며 경악과 감탄이 섞인 시선으로 봤는데, 그 생각의 나열들이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진리에 집중할 수 없게끔 하는 걸 보고 소름이 끼쳤다. 책의 첫 페이지 쯤에 뇌졸중에 걸린 사람이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죽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며 미리 고지했는데 그게 도움을 청해야한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다니. 내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것들을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한다는 점이나 그렇게 회복을 해도 뇌질환이 걸리기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될 거라는 점보다 도움 자체를 요청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 정말 무서웠다. 저자가 숫자를 애써 기억한 다음 겨우겨우 수화기를 들어 "나는 질이야. 살려줘!" 라고 외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이런식으로 저자는 뇌졸중에 걸린 사람이 왜 쉽게 도움을 청할 수 없는지, 주위 사람들은 뇌졸중에 걸린 사람을 어떻게 돌봐야하는지 한권의 책으로 보여준다. 보면서 느낀 점도 많았고 무서운 점도 많았다. 저자가 뇌질환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뇌를 향한 사랑도 있겠지만(지금봐도 와 내가 뇌졸중에 걸렸어! 라는 부분은 여전히 경이롭다) 저자와 어머니가 긍정적인 마인드로 회복을 향해 계속 나아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내가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슬퍼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볼 줄 알아야 다음에 무엇을 할지 판단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절망이 회복을 가로막는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언어 능력을 잃든 아니든, 나는 여전히 나이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지만 터무니없는 목표는 아니었다.', '내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을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달려있다' 라는 구절은 딱히 뇌졸중에 걸리지는 않았더라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조금 생소하고 어려웠지만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우리 몸이 단순하지 않음을,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내 몸을 위해 힘내고 있고 그러니 모든 것을 잃어도 다시 원궤도로 돌릴 수 있음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완독한 지금도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이렇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저자는 뇌졸중에 걸리고 희망을 봤다는데 아직 내 입장에서는 절망이 앞선다. 그렇지만 언제 누가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 이런식으로나마 조금씩 알아가고 배워나가야겠지. 책 뒤편에 있는 뇌졸중 위험신호와 자가진단법은 꽤나 많은 도움이 될 거 같다. 여러모로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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