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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NUT BUTTER/글

【221204】긴긴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 p.120

 

 생명이 살아갈 힘을 얻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부나 명예, 직위 또한 중요하지만 노래 전쟁터에서 이선희가 말했듯 제일 중요한 건 사랑일테다. "작지만 위대한 사랑의 연대". 띠지에 적혀있는 이 문장은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이의 삶을 관통한다. 다리나 눈이 불편한 친구를 위해 그와 짝이 되어 발을 맞추고, 악몽을 꾸는 친구를 위해 이야기를 하염없이 읊는 등 그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다. 몸속에 차곡차곡 쌓인 그 감정들은 등장인물이 좀 더 옳은 길을 가게 방향을 틀어주고 삶을 지속하게 한다. 비록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그들을 향한 복수심에 불탈지라도. 사랑은 그만큼 위대하다.

 

 자의적 타의적으로 이별을 거듭한 노든의 삶은 겨울과 같다. 서늘하고 날카로우며 생명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쌓인 눈마냥 잔잔한 분노를 품고 있으며, 가슴속에 똬리를 튼 복수심은 노든을 파괴적으로 만든다. 그런 상황속에서 노든을 거쳐간 많은 이들의 사랑은 이 추위를 이겨내라며 전해주는 햇살과 같다. 언젠가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길 바라며, 노든이 아무리 내치고 경계하고 침묵해도 그들은 꾸준히 햇빛을 쬐어 흰 풍경이었던 노든의 마음에 푸르른 초목을 만든다. 그리고 그 사랑이 돌고 돌아 펭귄에게 닿는 순간 노든은 말한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라고. 마치 코끼리 유치원을 벗어날지 말지 고민하는 노든에게 할머니 코끼리가 그리 말했던 것처럼.

 

 서글픈 긴긴밤이 지속돼도 서로가 있기에 버틸 수 있고, 내 안에 사랑이 있는한 나는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었다. 화자가 누구인지 뒤늦게 알려주는 서술 방식도 특이해서 내 안에 긍정적으로 자리잡았다. 겨울에 읽기 딱 좋은 작품이라는 평을 봐서 다행이다. 덕분에 나 또한 이 겨울을 잘 이겨낼 온기를 얻은 기분이니. 더러운 웅덩이 속에서도, 홀로 견뎌야하는 긴긴밤에서도 밝은 빛을 찾을 일이 분명 올 것이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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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 )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p.16 )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p.60 )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p.65 ) 노든은 목소리만으로 치쿠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발소리 만으로 치쿠가 더 빨리 걷고 싶어 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p.71 ) 언제나 그랬다. 노든은 옛날 기억에 사로잡힐 때마다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노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p.84 )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어. 왜냐면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잖아.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해."

 

p. 94 )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p. 101 ) "날 믿어.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게다가 코뿔소가 키운 펭귄인데,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p. 120 )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 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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