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후기 스포 주의 !!

적독 청산 프로젝트 첫번째, 〈새를 잊은 마녀에게〉. 적독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새 책을 읽는 짜릿한 맛을 잊을 수 없었기에 새 책은 공부하는 틈틈히 읽고 적독은 자기 전에 읽겠노라 호언장담을 했는데 효율적인 방법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예전에 한번 읽었다가 멈춘 적이 있는 책으로, 예전에 이 책을 사준 친구에게 '남자 주인공 시점이라 읽기가 힘들다'고 한 바 있는데, 다시한 번 천천히 읽어보니 이 책은 남자 주인공 시점이기 때문에 빛난다는 것을 알았다.
새를 잊은 마녀에게, 교활하지 못한 마녀에게의 연작인 로맨스 판타지. 마녀가 있는 스팀펑크 세계관으로, 대륙 잉그람을 배경삼아 <공정한 알피어스>의 후계자 빅토리아 알피어스와 잉그람의 하나뿐인 왕자 알렉 아크라이트의 사랑과 해방을 다룬 이야기다.
앞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로맨스 판타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남자 주인공 시점이다. 첫 문장부터 알렉 아크라이트 왕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축복속에 태어나 어떤 망나니로 자랐는지 보여주는 문장들이 나열된다. 그 점이 다소 생경할 수 있겠으나 이 소설을 완독하면 왜 이야기가 알렉의 시점으로 진행됐어야 하는지 납득이 된다. 본디 소설이라함은 대부분 목표를 찾아 이루어나가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무엇이든 확고한 사람보다는 미숙하여 고뇌하는 성정의 주인공을 내세우는 편이 좀 더 다채로운 이야기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빅토리아 알피어스는 시점의 주인공이 되기에 부적합하다. 그는 투텔의 저항군을 몰살시키며 든 회의감으로 더이상 자신을 구속할 수 없는 머나먼 대륙으로 떠나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다. 그 확신에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다. 그 예로 절친인 시에나와 자신의 이모인 수리 알피어스조차 말리지 못하지 않았는가. 휴고 알피어스가 저 너머 대륙에 가면 뭐가 있을지 모른다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까닭은 빅토리아 알피어스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는 걸 파악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곳에 날 억압하는 것이 있다면 무참히 깨부술 것이다.
"누구든 상관없어요. 여신이라면 죽일 거고, 하늘이라면 찢을 거예요. 나는 할 수 있어요."
멋모르고 덤비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순종하지 않으리라. 굴종하여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이 한목숨 거기서 끝내는 편이 나았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매여 개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 새를 잊은 마녀에게 中
한편 알렉 아크라이트는 왕실이 저지른 기만과 부정의 상징으로 모든 진실을 깨우친 그날부터 제 머리 위에 있는 왕관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찾고 싶어했다. 빅토리아와 같은 목표이지만 그에게는 확신과 용기가 부족했다는 점이 흠이다. 작중에서 서술된 것처럼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니 이만한 호사에 자유면 남는 장사라 자신을 위안하면서 생을 살아왔다. 자유를 꿈꾸면서도 일평생 누렸던 모든 것을 쉬이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알렉이다.
그래서 알렉이 시점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그가 빅토리아를 만나 어떻게 성장하는지, 그리해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는지 서술하는 편이 다채로운 분위기와 몰입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저항이래봤자 대학을 빼먹고 술과 사냥에 빠져 사는 것밖에 못했던 알렉이 모든 진실을 공표하고 자유를 위해 한발자국 나아간 것에 빅토리아의 영향이 아주 지대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쟁취해야 한다.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맞서야 한다. 개처럼 묶여서 평생을 사느니, 죽음을 무릅쓰고 목줄을 끊어 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내게 가르쳐 준 것.
─ 새를 잊은 마녀에게 中
빅토리아의 별은 겨울의 별 발디비아지만 알렉의 별은 빅토리아다. 겨울의 별 발디비아가 어디에서나 자신을 비추고 있을 것이니 미지의 세계도 두렵지 않다고 말한 빅토리아처럼 알렉 또한 빅토리아가 제 옆에 있다면 어디라도 두렵지 않을터다. 같은 처지지만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을 미워할수도 있을지언데, 알렉은 그를 사랑하기로 했다. 사랑하면서까지 이기적이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도 너의 족쇄였니?"
─ 새를 잊은 마녀에게 中
사랑, 마법으로도 피워내지 못하며 과학으로도 흉내내지 못하는 신비. 마녀들이 개인적인 성정을 띄고 있다는 걸 다시금 되새겨보면 작중의 인물들이 내세우는 사랑은 더욱 더 값지고 소중하다. 시에나가 먼 대륙으로 떠나려는 친구를 책망했던 일이나 수리가 혹여 자신도 조카를 붙잡는 족쇄였을까봐 전전긍긍한 일, 휴고가 하나뿐인 제자를 위해 알피어스의 인장을 훔쳐 달아난 일이나 찰리가 제발 알렉을 살려달라며 부랴부랴 가져온 보석을 쏟아낸 일까지. 비단 주연들뿐만 아니라 조연들도 나름의 사랑을 했고, 사랑은 그들을 풍요롭게 만드는 매개체이자 이별을 보다 찬란하게 비추는 별이됐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던 조그만 섬.
잿빛 구름으로 뒤덮인 밤하늘에서 우산을 나눠 쓴 연인이 천천히 내려왔다. 그들이 꿰뚫고 지나온 구름의 틈새로, 겨울의 별 발디비아의 별빛이 서서히 드리워진다. 사랑하는 딸의 앞날을 축복하듯, 밤하늘 수억 별이 보태는 영원한 기원을 담아.
─ 새를 잊은 마녀에게 中
많은 사랑에서 비롯한 성장과 행복과 투쟁을 그려낸 책 〈새를 잊은 마녀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세계관이었기에 이를 이제 보내줘야한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작품으로 전작의 주인공인 디아나와 세드릭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처럼, 빅토리아와 알렉도 언제나 승리(victory)하며 살아갈 것을 알기에 섭섭함은 뒤로하고 그들의 앞날에 찬사를 보낸다.